-273℃짜리 지랄
누구나 중학생 시절 더 낮아 질 수 없는 절대온도가 -273.16도라고 배우지만, 왜 그 보다 더 낮은 온도는 존재하지 않는 지 궁금했던 사람을 나는 별로 기억해 낼 수 없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 교육이란 굴종의 역사였으니까.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온도란 입자의 운동량을 재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어떤 입자도 정지상태 보다 낮은 속도로 움직일 수는 없기 때문에, 온도에는 하한이 생긴다. 영하 273.16도에서, 그 어떤 입자도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입자는 늘 약동하고 있는데, 이 움직임이 없으면 세포는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다. 소위 열량이라는 것이 이 약동의 정도를 말하며, 이것이 곧 에너지이다. 인간은 섭취한 음식에 포함된 탄소를 산소와 결합 시킬 때 발생하는 열량으로 생존하며, 그래서 밥을 먹고 숨 쉬어야 한다. 어이없게도 이렇게 생산된 대부분의 열량은 체온을 유지하는 데 쓰인다. 파충류의 경우, 매우 직관적이고 우아하게도, 햇빛을 쪼이는 방법을 택했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적게 먹어도 된다.
온도가 낮은 곳에 있으면, 우리 몸의 입자가 외부를 가격하여 잃게 되는 움직임 만큼, 외부가 우리를 다시 가격하여 움직임을 돌려주지 않기 때문에, 에너지를 서서히 잃게 된다. 어떤 우리 조상의 뇌들은 그 경우에 추위라는 고통의 비젼을 보여주어, 개체가 그 상황에서 벗어나게끔 유도했고, 그렇게 하지 않았던 뇌를 가진 개체들은 전부 얼어죽어 버렸다. 늘 그렇듯, 우리는 생존자의 자손일 따름이다.
결국 따스함이나 추위라는 것은 뇌의 진화과정에서 생긴, 뇌 안에서만 존재하는 관념일 뿐, 엄밀히 말해서 물리적인 현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온도 뿐 아니라, 색깔, 소리, 향미, 촉각 모든 것이 이런식으로 태어났고, 이것이 빚어내는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은 사실, 브레인 비젼에 불과하다.
인간은 평생을 이런 관념속에서 지내기 때문에, 어느쪽을 현실이라고 부를 것인지에 대해서는 애매모호성이 있다. 현실이라는 인식 자체가 관념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젼이 형성되는 과정 중에, 뇌가 외부 자극에 반응하여 조직적 연결 구조를 이뤄가는 현상을 자기 조직화라고 한다. 이 과정과 결과는 개체마다 고유성을 가진다. 그 한 예로, 동일한 외부 자극에 대해 정확히 일치하는 뇌의 부위가 반응하는 사람은 없다. 같은 운동을 연습해도 그 능숙해지는 정도는 다르게 된다.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같은 빨간색을 본다고 하더라도, 비전이 동일하다고는 볼 수 없다. 어떤 한사람에겐 파랗게 보이는 것을 다른 한 사람은 붉은 색으로 보고 있을 수도 있다.
이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미치도록 막강한 관념이 태어나 다시 한 번 인간 세상을 재 정의하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언어이다. 우리의 서로 다른 비전에 동일한 이름을 붙임으로써, 통일성을 얻게 된다. 그 과정은 매우 단순한데, 어떻게 보이건 간에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교육을 받으면 된다. 어떤이는 파란색이 당신이 보는피의 빛깔로 보였었겠지만, 언어 교육과정에서 그는 그 색에 파랑이라는 관념의 주박을 씌우게 되고, 인간 사회는 그렇게 언어를 중심으로 통합된다.
무미 건조한 물리적 현실에서 생존을 위해 감각의 세계가 태어 났고, 사회성을 통한 진화를 위해 언어의 세계가 생겨난 것 처럼, 그 위로도 세계는 계속해서 생겨났다. 아무튼 이 세계들은 의미라는 달콤한 열매를 제공한다.
스스로 비존재적, 비가치적이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구의 비전을 만들고, 허구의 욕망을 키워 이중 삼중의 관념화를 중첩시킨다. 예를 들어 인간은 고전 음악, 소설, 영화와 같은 문화적 욕구와 충족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욕구는 오로지 관념 속의 욕구를 만족시킬 뿐, 생존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상한 식도락의 세계, 변태적 성행위, 반음조차도 몇개로 쪼개낸 컨템포러리 음악,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물리적 유전자의 진화 특성을 완전히 잃었다고 봐도 좋지 않나 싶다.
생존과 통합을 위해 시작되었던 관념화는 이제, 일부 기득층이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조작된 테러,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행복의 허상, 반복적으로 미디어에 노출되는 미인상과, 세뇌적 음악들. 자본가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끊임 없이 생산되는 수요와 공급. 실존하지 않는 여러가지 개념들을 강요당하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자유롭게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며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지경에 도달 할 만큼, 중첩관념의 세계는 정교해졌다.
무슨 책을 읽건, 어디에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건, 결코 그런 식으로 존재가 채워지지는 않는다. 공험함은 이내 다시금 자리할 것이고, 이것으로 도망칠 방법은 영원히 관념을 중첩시키는 것 밖에는 없다.
이러한 문화적 유전자(이하 밈)의 자기조직화의 반복은 현격하게 인간을 고립시킨다. 분리교육은 대표적인 예이다. 아직도 많은 유태인 어린아이들은 고작 몇천년 전에 지구가 생겨났다고 배우고 있다. 깊히자기조직화 된 우리들은, 그 특수성으로 인해, 다시금 고립되는 웃긴 상황에 봉착한다.
아무튼, 연애하면 모든게 해결된다. 레알. 지랄 끗.